1984

Dong-Ha Min (’83)

2학년 가을의 M.T.

– 우리 곁을 떠날 뻔한 벗을 기억하며

1984년의 9월은 호우와 홍수로 시작된 낭만없는 가을이었다. 덕분에 우리 동기
중에도 수재민이 2명이나 생기는 불상사가 있었으니까. 학내 상황은 언제나
심상치 않았고, 우리는 지도 교수님이 바뀌는 행운(?)을 잡기도 했다. 9월말이
되자 매년 그러했듯이 가을 신드롬에 시들시들거리는 녀석들이 생겨나더니
무엇인가 신나는 일이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때 마침 학생 회장단이 휴학
처리되는 등 학교가 소란스럽고 매우 눈물겨운 환경이었던 터라 MT를 가는 것이
어떻겠는냐는 의견에 다수가 동조했고 곧 실천에 옮겨졌다. 사건의 발단인 것이다.

9월 30일 일요일 오후 3시경 재창이와 치규는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 앞의 인도에서
소주와 사발면을 먹은 뒤 쪼그리고 앉아 film을 말아 만든 불면 삑 소리가 나는
장난감을 입에 물고 지나가는 애들에게 장난을 걸며 늦게 오는 친구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3시반이 지나자 동기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각자 사정에 따라 1,2진으로
나뉘어서 출발하여 목적지인 신갈에 모인 것은 저녁 으스름한 때가 되어서였다.
80년대 전반부의 학번이라면 누구나 잘아는 84학번의 ‘강치규’라는 불청객이
자기도 끼워달라고 떼를 써서 쫓아온 것은 다음 날로 이어지는 사건의 촉매가 된다.
(우리 술을 많이 축냈다)

저녁에 모이고 보니 12명, 전체 인원의 약 30%에 불과했지만 아쉬운대로 그동안
서로 나누지 못했던 쌓인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보통의 MT에서 그렇듯이
밤이 깊어 가면서 이야기는 점점 심각한 방향으로 흘렀고 서로 격한 감정을 토로하며
술을 퍼마셔댔다. 이 때만 해도 이야기의 주인공인 재창이는 전혀 취하지도 않았고
열심히 대화에 참여하며 같이 노래도 부르며 즐기고 있었다. 심각한 이야기들이 대강
마무리된 후 본격적인 자유 여흥 시간이 시작되자 그야말로 천방지축, 개성을 발휘
하기 시작했는데, 찬우는 특유의 끈끈한 목소리로 민요가락을 읊어댔고, 춤 좋아하는
희정이는 ‘보이 죠지’ 흉내를 내며 잘도 흔들어댔다. 새나라의 어린이들과 술과 함께
꿈나라로 떠난 벗들을 뒤로 하고 나머지 잠없는 불량학생들은 계속 술을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중얼거렸다.

이 날 술에 혼난 친구들이 여럿있다. 홍일점으로 참석, 불안에 떨던 미화는 포도주와
소주 2잔 마시고 층계에서 잠이 들었고, 혼자 ‘카멜레온’을 외치며 춤추던 희정이는
갑자기 사라진 한참 후에 미화 옆에서 잠든 채로 발견되었고, 재창, 치규, 찬우는
대중의 술 소주에 취한 반면 석의는 값싼 새우깡 안주와 비싼 패스포트의 부조화로
인해 취했다. (석의는 이날 이후로 새우깡을 멀리한다) 가장 눈치밥을 먹은 치규는
재창이 허리에 다리를 꼬고 매달려 흔들며 춤을 추다가 떨어진 후 곧 잠이 들었다.

극소수 학생의 조용한 대화와 다수의 코고는 소리에 새벽시간을 메우고 난 후 해가
뜨자 부지런한 미화가 불쌍한 동포들을 위하여 북어국을 끓여 주었다. 술로 속이
쓰린대도 북어국 냄새에 용기를 얻은 친구들은 그 달콤한 늦잠의 유혹을 이기고
일어나 아침 식사를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재창이가 일어나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는데, 이 때 우리는
청소를 하면서 빈 술병을 정리하고 있었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재창이가 눈을 뜨면
틀림없이 해장 술을 찾을 것으로 믿고 우리는 남은 술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아침먹은 밥상에 소주 한병이 남아있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조금 뒤 재창이가 눈을 뜨고 30초도 안되어 그는 남아있던 소주병을 찾아내곤 주위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한 병을 꿀꺽 꿀꺽 마셔버렸다.

우리가 걱정하기 시작한 것은 재창이가 곧 다시 누워 잠이 든 후부터였으나 심각하지는
않았다. 재창이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마무리를 해왔기 때문이다. 정리가 끝난 후
떠나려는 시각에도 재창이는 깨지 않았고 아무리 깨워도 나무토막처럼 묵묵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담요와 쇠파이프, 나뭇가지 등으로 들것을 만들어 재창이를
눕히고 갑자기 발작할 것에 대비, 혁대를 풀어 팔과 다리를 결박하였다.

신갈 버스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두어 시간 거리인데 우리는 이렇게 한참을 걸어
가면서도 재미있어 깔깔거리며 웃고 심지어는 길가의 코스모스를 꺾어 재창에게
뿌려놓고는 꽃상여라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우리는 두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재창이를 들고 한 팀은 우리가 먹어치운 술병들을
자루에 넣어 들고 내려왔는데 갈 길은 멀고 속도는 나지 않아 도중에 주위에서
리어카를 빌어 그 위에 재창이를 얹고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길이 좁기는 했지만
다행히 포장이 되어 리어카는 내리막이 되자 점점 속도가 붙었고 리어카 담당이었던
나는 같은 팀의 다른 애들과 뛰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리어카가 너무도 잘 굴러가길레 내가 손을 떼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달리는 리어카에서 손을 놓았다. 그러나 불행한 우연의 일치로
리어카를 잡고 달리던 네 사람의 손은 동시에 놓아졌고 그 순간 리어카는 쿵 소리를
내며 앞으로 넘어갔으며 들것에 놓여있던 재창이는 달리던 가속도로 대포알처럼
날아가 콘크리트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너무나 놀라고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재창이가 날아가는 순간에 눈을 번쩍 떴었기
때문에 달려가 괜찮으냐고 물었다. 하지만 재창이는 종전의 고요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있었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 때 추수를 위해 옆의 들판에 모여 일하던
동네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우리는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재창이를 깨워야겠다는 생각이 난 것도, 이 학생이 죽은 것이 아니라고 동네 아저씨
들에게 설명하고 난 직후였다.

우리는 급한 김에 옆의 냇가로 재창이를 끌고가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깨우려 했지만
허사였다. 이제 깨우는 일에 지치고 화가 난 우리는 재창이 머리를 냇물에 몇번
쳐박으며 깨라고 윽박지르기에 이르렀는데 동네 할머니가 이 광경을 보고 황급히
달려와 왜 사람을 죽이려 하는냐고 호통을 치시는 통에 우리는 그 곳에서 한참을
서투른 변명을 하며 야단을 맞고 서 있어야 했다. 결국은 할머니의 요구대로 읍내에
전화를 하여 택시를 불러타고 을지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재창이는 앰뷸런스를 타 본 셈이다. 비싼 링겔을 한참 맞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재창이는 의식이 들자 곧 왜 자기가 병원에 누워있냐고 우리에게 따지고, 주사가
아프다고 뽑아버리려 하는 등 때 늦은 행패를 부리고, 야단치는 의사와 싸울 뻔하고,
자기는 다 나았다고 하고 앙탈을 부려 그 비싼 링겔을 반이나 버리고 병원을 나왔다.
다른 친구들을 먼저 버스에 태워 보내고 난 후 재창이가 퇴원(?) 했는데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중에, 의사가 절대로 마시지 말라고 한 콜라를 기어코 사다 마시고. 어디서
날고구마까지 하나 집어와 씹어 먹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매우, 굉장히
속상했다).

버스로 1시간 가량 달린 후 용산 터미널에 도착하니 뒷쪽에 앉아 있던 재창이가 갑자기
사람들을 헤치고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그는 의아해하는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담벽에 두 손을 짚고 훔쳐먹은 날고구마를 모두 토해내고 있었다.
헛구역질까지 하며. 그러는 재창이의 등을 두드리며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 이놈아,
쎔통이다.”

재창이를 댁까지 모셔다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이지 뭐.”라고. 같이 갔던 친구들끼리만 나누기는 너무나 벅찬 경험이라 우리는
사건 시작으로부터 연속적으로 촬영한 사진들을 106호에 며칠동안 절찬리에 게재
하였다.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같이 행동했던 친구 (+후배 1)의 명단을 여기에 싣는다.
(가나다 거꾸로 순):
홍석의, 조미화, 정환길, 정재창, 이찬우, 이종엄, 신영용, 민동하, 김희정, 김정기,
강치규, 강동진

1984년 10월 1일 나의 일기 몇 귀절을 인용한다:
재창이 혼수상태. 들것 만들어 옮겨 을지병원에서 응급처치. 링겔맞고 오후 퇴원.
적반하장. 집에 데려다 주고 옴. 오늘 하루종일 고놈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네.
다음부터 술먹고 꼬장피우면 ‘생매장’이야!

말썽만 피우던 정재창은 개과천선하여 현재 한국과학기술원에서 화학을 전공하는
모범생으로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해양학과 동창회, 바랄, 1990)